책소개
≪대령의 사진≫은 1962년 갈리마르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이야기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깃발>, <대령의 사진>, <공중 보행자>, <의무의 희생자>, <코뿔소>, <수렁>과 <1939년 봄>이라는 단편 일기 여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깃발>은 1954년 ≪누벨 르뷔 프랑세즈≫ 2월호에 실린 작품이다. 일인칭 소설로 화자인 나와 아내 마들렌, 이들과 함께 아파트에 기거하고 있는 시체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가 1953년 8월 <아메데 혹은 어떻게 그것을 제거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희곡으로 개작했고, 이것은 1954년 4월 14일 파리의 바빌롱 극장에서 장 마리 세로의 연출로 초연되었다. 3막의 희극으로 소설 속의 화자는 아메데 뷔치니오니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기괴함과 환상은 무대 장식에서 더욱 허구적으로 드러나며 이야기 속의 사건들은 연극적 공포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작가는 시체는 원죄와 원천적인 오류, 지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더불어 점차 나와 아내 즉 부부의 삶을 갈라놓는 시간을 물질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대령의 사진>은 일인칭 중편소설로, 이오네스코가 소설집을 발간하면서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만큼 그가 중시하고 애정을 가진 작품일 것이다. 1955년 11월 1일 ≪누벨 르뷔 프랑세즈≫에 발표되었다. 작가가 1957년에 3막의 희곡 <증거 없는 살인자>로 개작했으며, 이것은 1959년 2월 조제 카글리오의 연출로 레카미에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연극에서 소설 속의 ‘나’는 베랑제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인물의 등장과 함께 이오네스코의 극작술은 베랑제 사이클이라고 불리며 큰 변화를 가져왔다. 범죄에 무관심한 법의 집행관들, 즉 경찰관들의 미스터리를 보여 준다. 작가는 악 앞에서 무능한 인간들, 그리고 신은 어떻게 사탄을 통해 피조물을 타락시키고 악마가 유입되도록 방치하고 있는지 악의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해 묻는다.
<공중 보행자>는 이카로스의 추락에 관한 이야기다. 이오네스코에 의해 동명의 희곡으로 각색되어 1963년 2월 8일 파리 오데옹 국립극장에서 장 루이 바로의 연출, 자크 노엘의 무대 장치로 초연되었다. 이오네스코는 이 소설에서 마치 글쓰기에 대한 개인적 비전을 제시라도 하듯 상상력을 마음껏 펼친다. 주인공에게 꿈을 꾸며 몽환의 세계를 여행할 때는 낙원의 행복한 삶을 겪지만, 현실로 귀환하는 순간 지옥 같은 참혹한 광경이 보인다. 주인공이 본 형상을 통해 이오네스코는 악몽을 물질화하려 한다. 즉 우리가 그런 지옥에 살고 있으면서도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려고 한다는 걸 지적하는 것이다.
<의무의 희생자>는 일인칭 소설로 1952년에 발표한 단편이다. 이오네스코는 이 소설을 <의무의 희생자들>이라는 제목의 희곡으로 개작했는데, 원제의 “희생자”가 복수의 “희생자들”로 바뀌었다. 또한 이 희곡에 “거짓 드라마”라는 부제를 붙였으며 1953년 2월 카르티에라탱 극장에서 자크 모클레르의 연출로 초연되었다. 소설 속의 ‘나’는 심리극의 특성을 띤 이 연극의 주인공인 슈베르로 등장한다. 이오네스코 자신을 투사한 것이다. 인간의 행복을 개인적 이념에 종속시키는 광적인 사람들에 속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옹호하는 이념의 순교자들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설정하고 있다.
<코뿔소>는 1957년 9월 ≪새 문학≫에 실렸다. 이오네스코는 이 소설을 동명의 희곡 <코뿔소>로 개작했다. 그것은 1959년 11월 6일 독일 뒤셀도르프의 샤우슈필하우스(극장)에서 카를 하인츠 슈트루의 연출로 초연되었다. 이어서 1960년 1월 22일 파리 오데옹 국립극장에서 장 루이 바로의 연출로 재공연되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가는 인간성을 위협했던 잔혹한 전쟁과 나치즘의 광기를 직접 목격했다. 이 작품은 독일의 나치와 같은 파시즘에 대한 풍자며, 그것과 흡사한 독재 권력의 이데올로기, 가부장적 폭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드라마다.
<수렁>은 일인칭 소설로 1957년 ≪계절 수첩≫에 처음 게재되었다. 이 소설은 이오네스코의 가장 의미심장한 작품들 중 하나다. 유머러스한 특징이 없고 매우 느리게 진행되며 소설적 구성에 공을 들였다는 점에서 그의 다른 소설들과 다르다. 때때로 어린 시절에 겪은 라 샤펠-앙테네즈의 추억과 풍경들이 부각되기도 한다. 시간의 가속화와 사라짐,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경이로움, 밀실 공포증, 형이상학적 불안, 상승과 추락의 꿈, 죄의식 콤플렉스 등. 어머니 그리고 아내에 대한 추억들이 기억 속에서 뒤섞이고 잃어버린 신발에 대한 재귀적 상징처럼 작가의 몇몇 고정관념은 덧없이 사라지는 기호의 형태로 드러난다. 작가는 이 자전적 소설을 동명의 시나리오로 각색했고, 자신이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70년 독일 출신의 하인츠 폰 크라머 연출로, 대부분은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프랑스 라발 지역의 라 샤펠-앙테네즈에서 촬영되었다. 독일의 쾰른 텔레비전에서 1971년 1월에 처음 방영되었고 이어서 11월 프랑스 팔레 드 샤이요 영화 박물관에서 상영되었다.
<1939년 봄>은 작가가 “추억의 파편들”이라고 부제를 붙인 것처럼 일기의 페이지들이다. 1939년에 이오네스코가 서른 살이 되어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라 샤펠-앙테네즈를 다시 방문한 후 기억을 되살려 쓴 글 모음이다. 그는 당시를 추억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단편적으로 써 나갔다. 그곳에서 보낸 2년(1917∼1919)의 전원생활은 미래의 극작가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이곳을 잃어버린 낙원으로 표현했다. 물랭의 농장에서 만난 사람들, 함께 놀던 아이들, 주변의 풍경들. 농부 바티스트와 그의 아내 자네트는 아이들에게 애정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들 덕분에 어린 이오네스코는 시골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었다. 전원의 풍경과 자연의 모습은 이오네스코가 <1939년 봄>에 묘사한 것과 차이가 없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3월 이오네스코 연극 축제가 열린다.
200자평
이오네스코의 소설들은 극작품을 예고한다. 부조리극 작가로서의 명성에 가려져 극작품들보다 주목을 덜 받은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이 소설들은 해당 연극을 이해하는 데 어떤 설명이나 해석의 단서를 제공한다. 이오네스코가 연극 무대를 상상하면서 소설을 썼다고 밝힌 바 있듯이 소설 속의 인물, 대화와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연극의 설계도를 연상시킬 것이다.
지은이
외젠 이오네스코는 1909년 루마니아의 슬라티나에서 법학을 전공한 아버지와 유대계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파리로 이주하였고, 아버지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부모의 이혼, 궁핍한 생활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세 살 때 루마니아로 돌아와 1929년 부쿠레슈티 대학 불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 만난 미르체아 엘리아데, 에밀 시오랑과는 훗날 파리 망명객 생활을 함께하며 평생 영향을 주고받았다. 1931년 루마니아어 시집 ≪미미한 존재들을 위한 비가≫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고, 루마니아어 평론집 ≪거부≫를 발표하면서 이후 이오네스코 문학의 특징이 되는 유머와 역설, 독설이 뒤섞인 문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1936년 일간지 <질서> 편집장의 딸 로디카 부릴레아누와 결혼 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1950년 희곡 <대머리 여가수>가 초연되어 연극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의자> <코뿔소> 등을 발표하며 베케트, 아다모프, 주네와 더불어 부조리극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외로운 남자≫는 외젠 이오네스코의 유일한 소설이자 자전적 작품으로, 인간 사이의 소통의 어려움과 이데올로기의 폭력성,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20여 편의 희곡을 통해 원숙기에 다다른 이오네스코는 1970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3년 예루살렘상, 1976년 막스 라인하르트 메달, 1985년 T. S. 엘리엇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루마니아의 정치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94년 3월 파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옮긴이
박형섭은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3대학에서 <이오네스코 연극 속의 부조리 연구>로 석사 학위를, 파리8대학에서 <이오네스코의 베랑제 사이클에 나타난 비극의 의식>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현재 부산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아르토와 잔혹연극론≫(월인, 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코뿔소≫(동문선), ≪잔혹연극론≫(현대미학사), ≪노트와 반노트≫(동문선), ≪이오네스코의 발견≫(새물결), ≪잔혹성의 미학≫(동문선), ≪기호와 몽상≫(동문선), ≪문화국가≫(경성대출판부), ≪도둑일기≫(민음사), ≪의무의 희생자≫(지식을만드는지식), ≪장미의 기적≫(문학에디션 뿔) 등이 있다. 주로 이오네스코, 베케트, 주네, 아르토 등 프랑스 현대극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차례
깃발
대령의 사진
공중 보행자
의무의 희생자
코뿔소
수렁
1939년 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이렇게 장사를 해 가면서, 여자를 데리고 아까 보신 그 못가에 다다릅니다. 그러면서 재빨리 대령의 사진 좀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지요. 그게 결정적입니다. 사방은 이미 어둑어둑하겠다,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여자는 몸을 굽히죠. 그 순간 그 여자는 마지막입니다.
-<대령의 사진> 중에서
2.
“더 빨리, 자, 서둘러, 씹어, 삼켜.”
내 입천장과 혀가 찢어졌다.
“빨리, 빨리, 한 조각 더, 자, 씹어, 삼켜!”
나는 다시 나무껍질을 깨물어 그것을 통째로 입안에 쑤셔 넣었다.
“삼켜!”
-<의무의 희생자> 중에서
3.
나는 너무 흰 내 몸과 털이 난 다리를 바라보았다. 아! 단단한 가죽과 짙푸른 멋진 색깔과 코뿔소들처럼 털 없는 반들반들한 피부의 알몸을 가질 수 있다면!
-<코뿔소> 중에서
4.
그렇지만 희미한 윤곽, 내 몸 대신에 그림자와 같은 어떤 것이 존속해 있었다. 오래전부터 공포는 사라졌고 욕망 또한 사라졌다. 아니, 아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분명 모든 것을 잃었다. 그렇지만 다시 시작하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리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눈을 감으면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여전히 중얼거렸다. 안개가 걷혔다. 그리고 나는 맑은 하늘의 푸른 이미지와 함께 떠났다.
-<수렁> 중에서
5.
“20년 후에 네가 다시 돌아온다면… 지금처럼 말이야… 물방앗간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거야. 아마 주춧돌조차도….”
“하지만 네가 여기서 보낸 일주일, 우리는 20년 동안 비어 있던 세월을 살아온 셈이구나. 죽은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 지낸 것이지.”
-<1939년 봄> 중에서